Imzizi Gathering 양쪽 젖꼭지를 잇는 선분을 하나 그린다.  오른쪽 젖꼭지에 수직선을 긋는다.  그렇게 직각 이등변 삼각형을 그린다.  빗변의 정중앙을 손톱으로 찍는다.  그곳으로부터 오른쪽 젖꼭지까지 파동 형태로 통증이 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를 상담했던 의사는 안검하수가 심한 남자였다.  내 눈에는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건성으로 물었다.  “파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종파인가요.  횡파인가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종파는 증오.  횡파는 애정입니다.  횡파가 항상 더 많은 피해를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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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회 A Night Gatherin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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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비행은 삿되다
  Witchcraft

The (three) Gossip,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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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Wing Cut, 2020
  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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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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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회에 참여하기: 명령에서 주술까지
함윤이




2023년 11월 19일 일요일, 임지현(이하 ‘지지’ 혹은 ‘임지지’)이 함께 카레를 먹던 중 말했다. “언니, 내 전시 리뷰 써줘.” 그것은 어떠한 구체성도 없는 제안이라 청탁보다는 앳된 요구처럼 들렸다. 상대를 어설프게 믿는 연인 간의 트러스트 폴이나, 단짝 친구끼리 주고받는 (신혼부부 대출을 함께 받기 위해, 혹은 늘그막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내던지는) 약혼 선언처럼, 그 요구에는 기이하도록 뻔뻔스러운 믿음과 애틋한 순진함이 있었다. 지지는 내가 본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으리란 판단을 용감하게 외면한 듯 보였고, 바로 그 점에서 그녀의 말은 명령처럼 들렸다. 지지는 내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그리하여 분명 무엇이든 써줄 것이란 기대를 담은 눈으로 거듭 말했다. “언니, 내 전시 리뷰를 써줘야 해.” 그 결과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쓰기는 결국 명령에 순응하는 몸짓이므로, 이 글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가를 요구할 수조차 없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사이에 오간 그 기이한 요청의 힘이 퇴색되지 않을 듯하다.

11월 25일 토요일, 나는 황해도굿의 계승자인 정순덕 만신의 진적굿을 보기 위해 북한산 어귀로 향했다. 올해로 신내림을 받은 지 50주년이 되는 정순덕 만신은 이번 봄과 가을에 사흘씩 굿을 진행했다. 황해도 굿에서 만신은 각 신에 해당하는 옷인 ‘무복’(신복, 신옷, 관듸라고도 부른다)을 입거나 벗음으로써 여러 신을 받아들인다. 장군의 한복을 걸친 만신은 칼을 든 채 장군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애기씨의 한복을 걸친 후에는 자신의 서운함을 아이의 말투로 풀어낸다. 그녀의 신딸과 그녀를 도우러 온 다른 만신들이 이 착·탈의의 과정을 돕는다.

그날은 나흘간 이어진 가을 진적굿의 마지막 날이었고, 오전부터 이어진 굿은 해가 저물어도 끝나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에서도 한복 차림을 고수한 무속인들은 해가 저물 무렵 야외에 제사상과 작두를 차렸다. 나는 만신이 축원을 읽는 순간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가, 오후 일곱시 즈음 추위에 진저리를 내며 산어귀를 빠져나왔다. 이제 동대문으로 가서 청량리 시장의 건물 2층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임지지의 《야회_거울쓰기》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아홉 시부터는 퍼포먼스 〈The (three) Gossip〉이 진행될 것이었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가자마자 낯익은 LG 세탁기 알림 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전시장의 가장 큰 스크린에서 상영 중인 〈거울쓰기〉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는 관객을, 즉 나를 계속하여 흠칫 놀라게 했다. 이 알림은 분명 나를 방해했으나, 동시에 또 다른 (지독한) 몰입의 세계로 나를 끌고 갔다. 그곳은 노동의 이미지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세탁의 신호. 당신이 외부에 오염시킨 옷을 원상복구 하려는 시도가 끝났음을 알리는 이 소리는 자연스럽게 세탁 이후의 과정-노동을 연상시킨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재생되는 어떤 과정: 빨래를 꺼내어, 말리고, 갠 후 다시금 옷을 입는 노동의 타임라인.

〈거울쓰기〉의 ‘여자’(김문희 역) 역시 이 과정에 잠겨 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거울에 비친 듯 뒤집힌 글자들을 쓴다. “나는 옷을 입기 위해, 오로지 옷을 입기 위해”. 거꾸로 쓰인 문장들은 완성되지 못한다. 여자가 꾸준히 시도하는 잠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스스로 “영원 같은 낮잠”에 빠진다고 표현하지만, 이 수면은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에 방해받는다. 세탁기 알림에 깨어난 그녀는 세척한 만큼 마모된 옷을 꺼내어 입으며 말한다. “제대로 된 곳에 머리를 넣고 제대로 된 곳에 팔다리를 넣는다면, 항상 구멍이 남아. 나는 언제나 그것이 불만이었다. 잘못된 곳에 머리를 넣고, 잘못된 곳에 팔다리를 넣는다면, 남는 구멍에서는 하나의 문제가 출몰한다. 매일 매일 옷을 입는다. 구태여 상처를 입는다.” 그날 북한산에서 굿을 벌인 만신처럼, 여자 역시 꾸준히 옷을 갈아입는다. 그 행위는 세탁기 알림으로 시작되는 노동 과정의 종착역이다. 이 종착역에서 여자는 구멍에 머리와 팔다리를 집어넣는다. 남는 구멍, 여자가 “문제가 출몰”한다고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야회는 시작된다.



‘야회(夜會)’는 밤에 열리는 연회로서, 임지지는 그중에서도 중세 유럽의 마녀들이 참여했다는 ‘사바트(sabbath)’를 야회의 기준으로 삼는다. 마녀들의 남편은 아내가 야회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밤중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머리맡에 몽둥이를 놔두었다. 그러나 〈거울쓰기〉의 여자가 말하듯 “초대되었다고 느낀다면, 그들을 거기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1하다. 임지지가 그려내는 여자들은 모두 야회에 초대받은 당사자들로 보이는데, 실상, 그녀들에게는 야회에서 벌어지는 행위보다는 야회로 이동하는 방식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한 듯하다. 야회로 가는 방법은 각기 다양하다. 〈모든 비행은 삿되다〉의 여자는 달걀을 거듭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사술〉의 여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 직한 국수를 끊임없이 먹으며 무덤가를 오간다. 〈거울쓰기〉의 여자는 세탁과 청소, (뒤집힌) 글자 쓰기를 반복하다가……다시금 옷을 입는다.

황해도굿에서 무복은 “신의 몫으로 만들어 바친 옷이나 보관되는 옷”2이다. 무당은 이것을 입음으로써 속세로 신을 불러낸다. 무당은 “무복을 입어야 인격을 지닌 인간에서 신격으로 상승하고, 신은 무복을 입은 무당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공수를 통하여 내뱉는다. (…) 무당은 무복을 입음으로써 보통의 인간을 초월하는 권위를 얻게 된다”. 즉, “무당은 평상복을 입은 일상적인 상태에서 무복을 입음으로써 신이 내린 혼돈의 상태, 즉 반일상적인 상태로 전환”3된다. 이는 《야회》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겪는 과정과 흡사하다. 무당이 수차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을 통해 신의 상태로 전환되듯이, 《야회》의 여자들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연회의 상태에 들어선다. 이들에게 일상적인 행위와 반일상적인 행위는 서로에게서 떼어낼 수 없이 엮여 있다. 주안점은 이 행위를 ‘어떻게’ 또 ‘얼마나’ 하는지에 있다. 끊임없이 루프 되는 전시 영상 속에서 임지지의 여자들은 계속해 옷을 세탁하거나 갈아입으며, 글씨를 거꾸로 쓰고, 달걀들을 날려 보내며, 죽은 자들이 묻힌 땅에서 국수의 면을 끝없이 삼키고, 불이 붙도록 그릇들을 씻는다. 야회로 가는 여성들은 직접 이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걷거나, 달리거나, 차나 배 혹은 비행기를 타는 대신 제자리걸음 한다. 일상의 반복. 그 안에는 생존을 위한 노동의 되풀이(청소, 세탁, 요리와 설거지……)가 있다. 이 되풀이가 강박적으로 지속될 때, 일상적 행위들은 어느덧 삶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벗어난다. ‘사술’이나 ‘비행’이라 일컬어지는, 기묘한 금기의 동작과 맞닿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은 일상의 구멍에 반복하여 몸을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몸속으로 연회를 불러온다. 계속하여 잠들거나 걷거나 던지는 여자의 내부에서 연회는 열린다. “초대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은 여기서 당위를 획득한다. 그녀들의 연회는 잠긴 문 너머의 바깥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몸속에서 이뤄진다. 여자 자신이 연회로서 ‘전환’되는 것이다. 〈거울쓰기〉에서 마침내 잠든 여자의 얼굴과 몸을 뒤덮는 이미지들은 불타는 도로와 겹겹이 피어나는 발바닥, 그리고 독백하는 여자 본인의 얼굴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들을 연회로 초대한 이가 누구인지 엿본다.



1. 원문은 그리오 드 지브리의 오컬트 서적인 『마법사의 책』(루비박스, 2016), 해당 문장은 임지지의 싱글채널비디오  〈거울쓰기〉의 나레이션에서 재인용 .
2.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황해도굿 무복’, 최은수 집필, 2023년 12월 25일 접속,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3067
3. 위의 글.



〈The (three) Gossip〉은 프로젝트 《야회》의 첫 이틀 동안 진행된 퍼포먼스로, 여기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혜영과 (상술한 ‘여자’였던)문희, 그리고 임지지다. 퍼포먼스의 시작과 함께 임지지는 전시장과 그곳을 채운 관객들 주위를 선회하며 안내 멘트를 읊는다. 이는 언뜻 비행기나 선박 승무원이 수행하는 안내 방송처럼 들리지만, 그 내용은 안내보다는 명령에 더 가깝다. “손님들께서는 앉거나, 눕거나, 서거나, 뒤돌아, 기대어, 눈을 감고, 이동하며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말은 전시장 혹은 세 여자 가운데 놓인 관객에게 특정한 움직임을 요구한다. “우리 공연은 공연 도중 자리 이탈, 무대 난입, 무단 입·퇴장이 모두 가능”하다는 발화 역시 마찬가지다. 문희와 혜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후 지지가 이어가는 안내의 말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십시오(두 번 반복).”

엄밀히 말하면 지지에게는 관객의 움직임을 통제할 어떤 권한도 없다(그리고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그런 권한은 어쩌면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퍼포머-작가의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분명 일말의 영향을 미친다. 여자를 가둔 집 안에서 울려 퍼지던 LG 세탁기의 알림음이나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처럼. 관객들은 지지의 안내 멘트가 단순히 전시 내의 허구를 강화하는 제스처인지, 혹은 자신들에게 던지는 직접적인 요구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반면 문희와 혜영은 지지의 안내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기에서 중시할 규칙은 안내 멘트의 직관적인 언어가 아닌, 마주하는 상대방의 몸이다. 문희는 엎어진 혜영 옆에 누워 그녀의 발목에 제 손등을 올린다. 혜영은 문희의 손을 치운 후 그녀의 등에 제 뒤통수를 포갠다. 혜영은 문희의 머리를 조심스레 옮긴 후 다시금 그녀의 신체에 제 몸을 겹친다…… 퍼포먼스의 초반부에서, 두 여자는 서로의 몸에 한정하여 명령과 규칙 그리고 약속을 수행했다. 다만 이 ‘수행의 장소’는 차츰 확장되어, 어느새 두 여자는 전시장의 사물(흰 베개와 은쟁반, 사과)과 관객 사이를 누비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여자들은 제 몸을 어루만지고, 다리를 늘리거나 등을 구부리며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낸다. 비슷한 동작들을 변주하며 확장하는 이 과정은 〈거울 쓰기〉와 〈모든 비행은 삿되다〉, 〈사술〉에서 반복되던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나에게는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 지켜보았던 또 다른 연회를 떠올리게 했다.

북한산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던 연회를 연 무속인은 자기 자신과 그 단골손님들을 위하여 계속하여 옷을 갈아입는다. 그에 따라 신의 목소리로 발화하거나 신의 몸짓으로 회전한다. 그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일상의 몸과 장소를 초월한다. 그 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서로의 몸을 탐색하던 문희와 혜영은 이제 상대에게 거리를 둔 채 사과를 깎거나 코어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노동과 훈련의 동작들이 거듭된다. 그 되풀이의 과정은 차차 여자들의 몸에 비일상적인 상태를 덮어씌운다. 관객들은 여자들의 상태가 착·탈의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이는 여자들의 명령이 바로 본인에게 적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여성의 명령은 무력함과 함께 움직여왔다. 명령하는 여성은 쉬이 히스테릭 환자 혹은 권위를 뒤집어쓰고자 애쓰는 남성의 아류로 취급되었다. 음성 비서를 비롯하여 친절을 위시하는 서비스업의 대표적인 목소리 대부분은 여전히 여성의 것4으로, 그녀들의 발화는 부드러운 태도로 이루어진다. 설령 그것이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한 안내 방송이더라도 이 부드러움은 배제되지 않는다. 여자들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우리가 각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안전띠를 맬 것을, 타인을 위협하지 말 것을, 담배를 피우거나 금지된 장소를 오가는 등 서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물론 모든 여성의 명령이 요청으로만 변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성들은 명령의 힘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 부족한 권위를 보완하기 위해 아예 다른 세계의 힘을 빌려온다. 그러므로 그녀들의 말은 명령 대신 주술이 된다. 주술의 언어는 〈The (three) Gossip〉에서 임지지가 처음 관객들에게 건네던 말들처럼, 분명 그에 따라야 할 합당한 이유가 없음에도 청자가 본인 또는 주변의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전문직으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하던 전근대 여성들에게 무업(巫業)에서의 활동은 타 영역에는 없던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무당이 된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종속적인 여성들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적인 사회적 역할”5을 할 수 있었으며, 의례를 이끄는 주체로 거듭난 여성은 이제 전과 다른 형태로 발화한다. 그녀의 발화는 아녀자의 자질구레한 잡담이 아닌, 힘을 지닌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이 과정은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이 배격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인 동시에 여성들이 어떻게 그녀들만의 방식으로 명령을 행했는가 보여준다. 그녀들은 ‘명령할 수 없는’ 조건들로 가득한 기존 세계를 수없이 루핑(looping)한다. 일상적인 조건들을 반복하는 동안 세계는 낯설어진다. 한 사람이 끝없이 삼키는 국수, 계속하여 던지는 달걀, 불이 번질 때까지 닦아내는 그릇들. 편평한 듯 보였던 노동이 서로 뒤얽히는 때까지 반복하면 균열이 태어난다. 균열 속 세계는 꿈꾸는 여성의 얼굴(그의 얼굴 반쪽을 통과하는 도로와 신체의 이미지)만큼이나 낯설다. 남성들이 알지 못하기에 침범할 수 없던 세계 속에서 여성들은 비로소 주술의 말을 왼다. 그것은 명령이지만, 동시에 기존 명령과는 다른 역학으로 움직인다. 균열 속 세계에서는 명령에 따르고 말고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명령을 내리는 일, 오로지 거기에 핵심이 있다. 주술의 언어로 외는 명령은 뒤집힌 글자들처럼 세계에 틈을 만든다. 《야회》의 여자들은 그 틈을 통해 새로운 연회를 연다.



4.“[ESC] 왜 음성비서는 여성 목소리일까”, 구본권, 『한겨레』, 2019년 4월 10일, 2023년 12월 31일 접속, 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89562.html
5.「여성무속인의 삶과 무속-가족구성원으로서의 서울지역 여성무속인을 중심으로」, 변지선, 2014년, 비교민속학회



안내원의 말에는 어떤 권위도 없으나, 그녀의 명령은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낯선 세계를 예언한다. 계속하여 옷을 갈아입는 여자, 뒤집힌 글자를 쓰는 여자, 국수를 먹는 여자, 달걀을 던지는 여자, 상대의 몸에 제 몸을 겹치는 여자, 본인의 팔다리를 늘리고 구부리거나 제 피부를 쓰다듬는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권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허구를 쌓아가고,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 허구에 동참한다. 어느덧 그들 또한 연회의 참가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때가 되면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라”는 안내원의 언어는, 여자들의 반복과 변주를 지켜보던 관객에게 서서히 영향력을 발휘한다. 익숙하던 신체가 느리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던 ‘동작’과 ‘접촉’의 의미는 서서히 변질된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때는 왔으며, 우리에게 “주어(졌던)진 자리”는 이미 사라져 있다. 바로 그때 명령-주술은 이행되는 것이다. 초대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야회에 도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