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조인들은 반려조를 길들일 때 날개 가장 바깥쪽의 깃털을 자른다. 비행 능력이 제한된 새들은 반려인에게 의존하게 되고, 이윽고 둘은 친밀해진다. 날개를 자르는 것은 ‘함께 살기’의 여러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은 사랑의 결정불가능성이 체현된 이미지다. 새의 눈을 가리고 날개를 훼손하는 장면에는 새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영문을 모르는 새의 울적한 몸부림도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한 가위질만이 있다.
가위질, 이것이 내가 천착하는 것이다.
사랑은 확신과 의심의 시소 타기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둘’에 대한 무한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 나는 계속해서 ‘둘’을 가위질한다. 캠코더로 스스로의 모습을 스크리닝하며 그 속의 나 자신과 어긋남/불복종을 수행했던 최초의 퍼포먼스로부터 ‘둘’이 시작되었다. (〈배신, 2014〉은 어머니와 딸의 전승되는 모녀 관계의 불화와 화해를 다루었다.) 이후 가부장제를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저항하기(〈사적영화, 2017〉), 소통불가능한 젊은 연인과, 혁명자들의 무덤이 된 섬의 이야기(〈체( )섬, 2017〉), 비대칭의 데칼코마니((리이오, 2018〉, 〈엉겅퀴, 2019〉) , 오십 팔면체 다이아몬드의 브릴리언트 컷팅과 진부한 러브레터를 첨삭하기(〈첨삭, 2020〉), 등 둘의, 혹은 셋의(〈Peeling, 2022〉은 소설가 이경자의 자전적 캐릭터 셋의 단절과 연대를 다루었다.) ‘절뚝이는 지속’을 수많은 말과 글, 무빙이미지와 물리적 찌꺼기들로 반복해왔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언제나 고유하게 불화하고, 그 불화에서 태어나는 서사는 이들의 유일한 화해가 된다. 마치 의미와 감각이 함께 추는 엇박자의 왈츠처럼 불분명하고 희미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다. 정해진 결말을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버리는 이야기. 설명할수록 모르게 되어버리는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 모든 봉합된 세계의 상처를 섬세하게 벌려, 외계로 향하게 하는 이야기(〈Dance!, 2020〉), . 따라서 내가 만드는 것들은 탈문학/유사영화/비미술 어딘가를 떠도는 유령 같은 대안서사를 닮았다. 이 유령에게는 이름이 있다. 길고, 짝수 음절이라 잘 기억에 남지 않지만, 몹시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