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장 내밀한 곳에서 시작된다
신재민(더 윌로 큐레이터)
개별적 특수성의 형성은 개개인의 다층성에 기반한다. 나는 이 다층성에 영향을 미친 커다란 이야기들을 역추적하는 데에 관심을 두며, 여성 서사 또한 개별적 특수성에서 공유되는 부정의injustice의 경험을 구조화하여 보편성을 재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 분화하고 수렴하는 복수의 여성에 관심을 보여온 작가 임지지의 작업은 특수에서 보편의 재구축으로 향하는 단계에 위치한다. 작가는 전시와 공동창작 퍼포먼스로 구성된 《야회》를 통해 초기 자본주의의 태동으로부터 시작된 구분짓기의 역사가 현대 여성의 일상적 삶에까지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 가시화한다. 특히 세 여성이 등장하는 퍼포먼스 〈The (three) Gossip〉은 개별 여성들 간의 고유한 서사가 어떻게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 내는지를 교차되는 일련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마녀사냥은 중세 시대에 종교 부패와 연이어진 악재에 대한 비난의 대상을 찾고자 자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중세부터 근대 초기에 걸쳐 일어났으며 근대 초기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그 형태가 변모했다. 즉,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합리주의에 근간한 근대 자본주의 하에서도 있어왔다. 작가가 참조한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에 따르면, 근대 초기 농업자본주의의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은 노동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는 성역할에 따른 노동을 구분짓고 여성의 노동을 불임금 노동으로 제한함으로써 여성을 남성에게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형성된 성역할의 이분법적 구분은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문 또는 험담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 ‘가십Gossip’은 원래 출산에 초대된 여성 친구들을 의미했다. 이는 출산이란 내밀한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돌보는 여성들 간 사적 공동체가 존재했음에 근거가 된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주요 표적 중 하나였던 산파를 중심으로 한 출산 공동체를 와해하고 서로 간의 불신을 초래했으며, 근대 자본주의는 여성의 노동과 활동범위를 집안으로 제한하며 고립과 소외를 만들었다. 〈The (three) Gossip〉은 과거 남성이 마녀사냥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냈던 허구인 ‘야회(夜會)’를 여성적 시점에서 재전유함으로써, 여성적 연대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회복한다.
작가는 이전 작업들에서부터 한 쌍이지만 동시에 불화하기도 하는 ‘둘’에 초점을 두어왔다. 이번 《야회》의 전시 시퀀스인 〈야회_거울 쓰기〉가 -사회화된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과 내면에 마녀적 속성을 내포한 여성으로- 한 사람 안에서 둘로 불화하는 모습을 통해 야회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린다면, 퍼포먼스 〈The (three) Gossip〉에는 복수의 여성 -두 여성, 그리고 둘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어떤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장 내밀한 곳에서 시작되며, 가장 내밀한 이야기는 종종 골칫덩이로 치부되는 것들이다. 여성의 연대와 공동체는 가장 내밀한 것, 골칫덩이가 공유될 때 가능하다. 골칫덩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가치로 환원될 수 없거나 노동의 가치를 절하 또는 거부하는 것일 수 있는데, 마녀사냥이 자행된 때 이는 자본주의가 지정한 정상성의 범주 바깥에 놓인 마녀의 속성이라 여겨졌다.
〈야회 - The (three) Gossip〉에 등장하는 한 여성은 충분한 사회화 과정을 거친 서비스업 노동자이다. 자본주의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의 기준에 끊임없이 맞춰가는 과정에서 탈각한 다수의 파편들을 ‘잃어버린 몸’이다. 파편을 그러모아 역추적하는 과정의 끝에는, 탈고정적인 몸의 원형이 있다. 다른 여성은 사회화의 요구에서 자의적으로 벗어나 있다. 여성의 노동인 재생산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분리를 거부한 몸이며, 탈각해야 할 골칫덩이를 여전히 그러안고 있는 ‘골칫덩이의 몸’이며, 경계를 흐리는 불순한 몸이기도 하다. 나는 작가가 이 두 여성 간의 불화를 그리려 했다기보다, 둘을 통해 여성 공동체의 가능성을 해체하고 묵인해 온 역사와 불화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본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여성은 관객에게 골칫덩이를 안겨준다. 범주 밖의 마녀적 속성을 탐닉하는 욕망의 장소이자, 내밀한 골칫덩이를 공유하는 이 야회의 장소로 관객을 초대한다. 그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머물기’를 택함을 제안함으로써 골칫덩이를 대하는 관객의 주체적 태도를 유도한다.
퍼포먼스 안에서 두 여성이 이끌어나가는 전개는 야회를 향한 남성적 시선을 비웃듯 그 경계를 아슬아슬 횡단하며, 현대 여성의 일상적 모습과 과거 야회와 관련해 구전되어 온 금기의 행위들을 교차해 보여주는 장면들로 관객을 교란시킨다. 터부시된 장소로 향하기 위해 모두가 잠든 밤 몰래 타인의 몸을 넘어 방 안을 빠져나가는 여성은, 잠든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자리를 뜨는 여성의 모습과 교차한다. 야회에서 행해졌다 전해져온 온갖 악행과 악마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빗댄 행위들은 여러 일상적 행위들과 겹쳐지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분짓는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골칫덩이의 몸과 잃어버린 몸이 나란히 걷는 후반부는 여성적 표현이라 여겨져 온 부드러움의 재개념화로 몫 없는 자들의 언어를 만든다. 자칫 환원적일 수 있는 ‘고통은 부드럽다’라는 문장이, 골칫덩이의 몸을 경유해 관객을 만난다. 수행적 발화는 골칫덩이의 몸이 내재한 다층성을 경유해 문장에 무게를 더한다. 문장을 마주한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본인이 내재한 골칫덩이를 바라본다. 수용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탈각할 것인가. 불화를 대하는 입장은 선택할 수 있다. 원하는 모습으로 머물 수 있다.
About.
Imzizi
Adopters of pet birds often clip the outermost feathers of their wings when taming them. Birds with limited flying ability become dependent on their owners, leading to a bond between them. Trimming the wings also serves to protect the bird from various disasters and risks associated with living together. Therefore, this imagery embodies the uncertainty of love. Scenes of covering the bird's eyes and damaging its wings contain nothing but the chilling act of clipping.
Scissoring. This is what I contemplate most deeply.
Love throws infinite questions about the 'two' into the uncertainty of assurance and doubt. I continue to scissor the 'two'. It began from the first performance where I screened myself with a camcorder, embodying the discord and reconciliation of the inherited mother-daughter relationship. The story of the uncommunicative young lovers and the island turned into the tomb of revolutionaries ('Che( ) Island, 2017'), asymmetrical decalcomania (('Reborn, 2018', 'Thorn, 2019')), brilliant cutting of a fifty-eight-faceted diamond and rewriting love letters ('Correction, 2020'). I have thus repeated the 'hesitant continuation' through numerous words and writings, moving images, and physical debris.
Text and image always inherently disagree, and the narrative born from this discord becomes their only reconciliation. Like a waltz where meaning and sensation dance together in an irregular rhythm, there lies an ambiguous and faint story. A story that casually bypasses the predetermined ending. A story that becomes more unknown as it is explained. The world's most famous secret. Stories that carefully unfold all the wounds of the sutured world, leading to the alien ('Dance!, 2020'). Hence, what I create resembles an alternative narrative akin to a ghost wandering somewhere between anti-literature/pseudo-cinema/non-fine art. This ghost has a name. It may be long and not easily memorable with an even number of syllables, but it is most likely a very specific and beautiful n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