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zizi Gathering 양쪽 젖꼭지를 잇는 선분을 하나 그린다.  오른쪽 젖꼭지에 수직선을 긋는다.  그렇게 직각 이등변 삼각형을 그린다.  빗변의 정중앙을 손톱으로 찍는다.  그곳으로부터 오른쪽 젖꼭지까지 파동 형태로 통증이 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를 상담했던 의사는 안검하수가 심한 남자였다.  내 눈에는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건성으로 물었다.  “파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종파인가요.  횡파인가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종파는 증오.  횡파는 애정입니다.  횡파가 항상 더 많은 피해를 주죠.”
Art Projects
야행자들 The Nocturnalians, 2024
야회 A Night Gathering, 2023

  거울쓰기
  사술
  모든 비행은 삿되다
  Witchcraft
The (three) Gossip, 2023
Peeling

  카노푸스, 고독의 해자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Wing Cut, 2020
  첨삭
  Dance!
  Index for love
  Bird Saver

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2019
  엉겅퀴
  리이오

체 (   ) 섬
사적영화, 2017
  미합의
  동정비처녀와처녀빗치
  더블룸
  벽돌 나르기,  
  안티 로망스 매지컬 버자이나

Text from other
  칼과 쓰레기 by. 서용순   비약을  위한  주석들  by.한상은
  어떤  여성들의  이야기는...  by.신재민

  야회에 참여하기  by.함윤이
  밤을  일으키며   by.오지은
   
Text from me
  사랑의 천재   친애하는 우리에게
  체체를 위한 섬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리이오  
  세계를 구하지 말 것,




About
C.V
Email

Instagram





칼과 쓰레기: 사랑의 긍정을 위한 서사
서용순





분리, 대립, 적대 – 사랑의 사태들/둘의 양상

대립의 시대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대립을 목격하지만, 그 대립은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이미 적대는 일상이 되었으며, 자신이 어느 진영에 속해있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이다. 두 가지 성,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性)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두 성은 만나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밀어내고, 만남 속에서도 분리를 확인한다. 그 ‘둘’의 탐험을 전제하는 사랑에도 분리와 대립의 현실은 지양되지 않는다. ‘한남’을 경멸하고 ‘페미’를 혐오하는 대립의 효과 안에서, 사랑은 자신 안에 적대를 고스란히 간직한다.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을 알리바이 삼아, 이기주의는 사랑의 이어짐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오늘날 사랑이 처한 자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부질없는 환상과 헛된 망상일 수밖에 없다. 결과는 처참하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어쩌면 자신만을 바라보는 ‘둘’은 적대의 마당에서 서로 피를 흘린다. 곳곳에 묻어있는 적대의 혈흔. 〈야행자들〉은 바로 그 혈흔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끝을 말하기, 끝난 사랑의 고통 속에서 사랑을 되짚기

과연 사랑은 끝났을까? 그렇게 가슴을 저미듯 느리고 쓰리게 지나가던 사랑의 고통은 혼자가 됨으로써, 상대방의 멀어지는 뒷모습과 함께, 마침내는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안다. 사랑의 끝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기어이 남긴다는 것을. 마치 천형의 흔적처럼, 도무지 지울 수 없는 자국으로 남은 사랑은 기억을 뚫고 나와 어떤 통증을 일으킨다는 것을.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달콤한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마음 한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다시 뛰쳐나갈 기회만을 엿본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 사라졌지만 사라진 그 상태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이 사랑이다. 〈야행자들〉은 바로 그 사라진 사랑, 사라진 채 되돌아오는 사랑을 다시 불러세우는 시도다.

임지지는 사랑의 끝나지 않는 끝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끝은 ‘약속된 장소, 약속된 시간에 끝내 나타나지 않음’으로 지각된다. 그렇게 남겨진 상실의 순간은 버려진 여러 가지 쓰레기들과 함께, 그 쓰레기들과 동일 선상에서 그 기억을 상기하는 절규로 호출되며, 이른바 ‘갈라진’ 둘의 서사가 시작된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서사는 어떤 순간을 넘어, 찰나를 넘어 사랑을 이어짐으로, 고통스런 이어짐으로 이끌려 한다. 서사는 의미와 무의미의 중첩으로, 힘겨운 언어와 그 언어를 방해하는 언어화할 수 없는 언어의 중첩으로 간신히, 힘겹게, 위태로이 이어진다. ‘둘’은 때로 서로 다투어 자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 침묵하기도 한다. 사과 둘, 돌멩이 둘이 아닌 그 ‘둘’. 분리되어 만날 수 없음에도 공백을 매개로, 결핍을 통해 만나고야 마는 그 ‘둘’은 어떤 필연성도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이어짐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지탱하는 노고의 질서는 우연을 영원으로 가져가고자 무던히도 애쓰지만, 결별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결별이야말로 필연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 ‘잘 사는 것’ -그것이 무엇이건- 을 금과옥조로 하는 삶을 지배하는 의지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망가뜨리고야 만다. 그러나 이 결별이 사랑을 무력화하지는 못한다. 결별이라는 필연은 사라지는 매개자로 사랑을 돌이켜 세우는 것이다. 〈야행자들〉은 바로 그 사랑을 되짚는다.


사과와 엉겅퀴, 빵과 진흙을 그대로 두기

근본적으로 사랑은, 일상적인 반복과 그 반복이 만드는 의미로 삶을 채우라는, 반복적인 일상을 벗어나지 말라는 요구를 차단하는 사건이다. 패턴에 따르는 삶은 일탈을 금지한다. ‘아침은 자꾸만 오고’ 인생의 ‘돌이킬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 질서를 중단시키는 것, 이러한 삶의 의미를 중단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사랑이 남긴 그 참혹한 혈흔 또한 이 ‘의미의 질서’를 힘겹게 중단시킨다. 반복의 중단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울음’이다. 그리고 사랑의 설렘과 꼭 마찬가지로, 끝난 사랑의 울음 역시 의미를 중단시키는 무의미의 도래일 것이다.

비단 울음만이 아니다. 바닷가에 밀려온 쓰레기들, 바다가 소화하지 못해 내뿜은 토사물들은 무의미로 처리되는 어떤 더미들이다. 그것은 사랑의 디테일이다. 오로지 그 ‘둘’만이 누릴 수 있었던 디테일들, 설레는 가슴이 몰래 간직하다 사랑이 끝난 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소화되지 않고, 배설되지도 않는 부유물들. 남들이 무엇을 하건, 그 둘만이 웃고 속삭이며 만들어낸 부유물들... 애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던 사과와 엉겅퀴의 집합, 빵과 진흙의 집합이 이루는 무의미의 사태들은 그렇게 사랑의 디테일과 완벽하게 합치된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있음, 의미 없음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그것은 분리다. 분리가 이루어지면 정의할 수 있고, 정의된 사태들이 분별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분리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의미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성립하는 것이 앎이고 지식이며, 그것이 모여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권력이다. 의미와 구분, 분별과 질서는 그렇게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것이 바로 무의미로서의 사랑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흔적, 그 처연한 혈흔은 결별의 필연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앎은 없다. 사랑은 예술이 꼭 그런 것처럼, 모든 앎의 정의를 피해 가며 자신을 그 분별불가능성으로 돌려세운다. 한 접시에 놓인 사과와 엉겅퀴, 빵과 진흙.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언젠가 끝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두자.